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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마흔에는 홀가분해지고 싶다 제4장 - 오카다 이쿠

by 쥬블로그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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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악습을 끊는 어른의 태도

21. 술 따르려고 회사에 들어온 게 아닌데 163p

어릴 때 내가 다닌 미션 스쿨에는 교칙이 거의 없었다.

학생 수첩에 적힌 교복 규정은 '우리 학교 학생이 어울리게'라는 말이 전부였다.

언뜻 자유롭고 좋아 보이지만 교사나 수녀의 주관에 따라 학생과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올바르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으니까 거스를 수 없다', '남편이 퇴근하면 그때 물어보자,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없다'라는 선악의 기준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두고 모든 판단과 책임을 떠넘기는 말이다.

 

결국 규칙을 위반한 사람을 단속하는 권위와 서로를 감시하는 세상의 눈이 우리의 사고를 정지시켜 버린다.

평소에 우리를 들볶는 완벽주의로부터의 속박은 대개 자기 자신의 가치 척도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 내면화된 경우가 많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관행을 내 손으로 갑자기 싹 끊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까이에 좋은 본보기가 있으면 흉내는 내 볼 수 있다.

또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꿔 나가기보다 가능한 것부터 순차적으로 시작하는 유연성도 필요하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조금 부자유스럽고, 처음부터 규칙이 있는 편이 훨씬 안정적이라고 느낀다.

 

자유는 어렵다.

또 규칙 없이 살아도 곤란하다.

새 하얀 종이에 아무 도구 없이 무작정 그림을 그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모두 전통과 격식을 중요시하며, 기존의 정답에 안도하고 기뻐하면서 불문율처럼 서로를 얽매고 서로에게 속박되려 한다.

 

그리고 우리 학교에 어울리는 학생, 우리 회사의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는 직원 등 모두가 그려 놓은 공통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똑바로 하라고 지적받는다.

마흔에는 홀가분해지고 싶다

 

22. 존댓말을 버리고 얻은 발언의 자유 171p

아무에게나 존댓말을 사용할 때 거부감을 느낀다.

'공경해야 할 연장자에게 정중히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사실 모든 연장자에게 존경심이 생기지는 않는다.

공경할 수 없는 어른이 많다.

왜 싫어하는 선생이나 심술궂은 상급생이나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어른이 말을 걸면 그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존댓말로 답해야 할까?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부모나 조부모, 친척과는 반말로 대화하지만 이웃이나 친구의 부모, 병원 의사에게는 존댓말을 사용한다.

단순히 친밀도가 낮은 상대여서 그렇지, 친부모보다 깊이 경애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게 아니다.

존댓말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상대에게 쓰는 말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공경하되 가까이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대부분의 어른들도 존경심 때문이 아니라 사이가 나빠서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 지금보다 거리를 좁히고 싶은 사람과 악수하고 포옹하며 편하게 부르다 보면 분명 훨씬 가까워질 텐데, 반말을 허락받기 전까지는 절대로 말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그 '된다'가 언제일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그 분위기는 전혀 가늠할 수 없다.

 

모두에게 존댓말을 쓰는 사람이 반듯하니 좋아 보여서 그런 사람과는 거리를 좁히고 반말로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뜬금없이 반말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정말 싫다.

그런 녀석들은 차라리 존댓말로 멀리 떼어 놓고 싶다.

 

동경하는 사람과는 한달음에 거리를 좁히고 나이 차를 극복해서라도 친해지고 싶다.

반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매일 밤마다 말투에 관한 규칙을 설계해서 몸에 주입시키며 독자적인 말투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말투를 바꾸면 인간관계의 자기장이 달라진다.

실제로 나는 존댓말을 최소한으로 줄임으로써 선배들과 더 친해졌다.

남 앞에서 어떻게 말할지를 생각하여 정한 규칙이 꽤 효과가 있었다.

그 결과, 단상에서 발표할 때의 울렁증도 다소 완화되었다.

혹시나 말투 때문에 내가 무례한 녀석이라고 미움받는다면 어쩔 수 없지. 체념하는 배짱도 생겼다. 무엇보다 어른에게 배운 대로 존댓말을 사용할 때보다 훨씬 마음껏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입니다', '합니다'로 말하는 신사들에 대한 관점이 변했다.

어릴 때부터 그들이 멋있어 보였던 이유는 말투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언어는 매력적일 만큼 자동화되어 있다.

위로는 아첨하고 아래로는 거만하고 상대와 상황에 맞춰 태도와 말투를 이리저리 바꾸는 간사한 사람들의 언어와는 차원이 다르다.

 

신사들의 인상이 훨씬 좋았던 이유는 말투를 통일하고 말의 전환 스위치를 폐지하여 인생에 있어 일종의 수고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신사들이 하는 말의 울림은 상당히 다르지만 대화문을 자동화하여 낭비를 없애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신사들과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타인과 대화할 때 말투를 매번 망설이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언어 스타일을 정하고, 정한 후에는 망설이지 않고 실천하는 태도가 발언의 자유와 호응을 동시에 가져다줄 것이다.

 

23. 약속 시간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181p

남편은 엄청 착실하고 꼼꼼한 인간이라서 어떤 약속을 해도 반드시 정각에는 정해진 장소에 도착한다.

멋진 습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꼭 본받고 싶은 마음에 나도 약속시간 전의 행동에 신경 쓰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5분 전에 도착해도, 어김없이 남편이 먼저 와 있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도쿄에 살 때 시간관념이 허술하다는 말을 호되게 들었던 지각쟁이인 내가, 미국에서는 시간에 엄격한 일본인으로 여겨진다.

세상의 보편적 기준이 너무 낮아서 내가 기다리는 입장에 서는 일이 많다.

 

공공 교통 시설에 시각표는 있으나 마나고 택배는 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일이 거의 없다.

11시 30분에 문을 열어야 할 음식점 앞에서 정오를 넘어서까지 기다리는 일도 일상 다반사다.

직원들은 우리 음식이 먹고 싶으면 얌전히 기다리라는 표정으로 유유히 가게 안을 청소한다.

악천후에는 많은 개인 상점이 영업 마감 시간 전에 셔터를 내리고, 틈만 나면 임시 휴업을 한다.

 

미국의 한 회사 인턴으로 일할 때 10시에 출근하면 늘 사무실 문이 잠겨 있었다.

열쇠를 가진 직원들이 점심시간즈음 도착해서 "미안, 오늘은 시장이 오후에 출근이라서"라고 말하며 혀를 내밀었다.

그래도 그들은 늦게 온 만큼 한눈팔지 않고 배속으로 일했다.

그날 해야 할 작업을 근무 시간 안에 끝내는 진행 관리만큼은 일본인보다 엄격했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 지켜야 할 시간은 확실히 지킨다"라고 말하면서 야근하지 않고 퇴근했다.

 

예전에는 지각하면 위가 아팠고 타인이 지각해도 짜증이 일었지만, 유야무야 하는 미국 사회의 영향을 받았는지 5분을 지각해도 사과하지 않고, 30분을 기다려도 화내지 않는다.

무심코 30분 빨리 도착해도 요즘은 오차 범위 안에 포함되는 시간이라 생각된다.

기다리기 싫으면 주변 가게에서 점심을 먹거나 책을 읽으면서 사무실 문이 열릴 때까지 좋아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면 된다.

세상만사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당연지사라는 생각만 잘 인식하면 손해를 보았다거나 이득을 보았다거나 따지지 않게 된다.

 

불난리에 휘말린 지인의 직장에서 소방대원이 때려 부순 문이 철거되었는데, 이후로 벽에 구멍이 뚫린 채 최저한의 보안만 유지하며 영업을 몇 개월이나 지속했다.

신청해 둔 복원 공사가 계속 늦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에 살았을 때라면 나는 이 같은 상황을 보고 내 일처럼 미친 듯이 격노했겠지만, 지금은 '그래, 문이 없어도 죽지 않네'라며 감탄할 뿐이다.

드디어 며칠 전에 문이 새로 달렸는데, 페인트는 칠하다가 만 상태다.

 

당연히 제대로 하지 않는 것보다 제대로 하는 게 좋다.

지각쟁이 소리를 듣는 것보다 약속 시간 전에 행동하는 게 좋고, 사무실 문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더 좋다.

하지만 다양한 환경에 몸을 두고 인생의 경험이 쌓여 갈수록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점점 늘어난다.

내가 어른이라는 생각 때문에 무리하게 하던 행동과 빈틈없이 새기던 습관을 되돌아본다.

이를 계기로 인생에서 무엇을 그만둘 수 있는지 찾아보면 좋지 않을까 싶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는 건 최저한의 규칙이다.

늦으면 사과하고, 상대방이 늦으면 화내고, 계약 위반이면 페널티를 부과해도 좋다.

하지만 '신입이면 분위기 파악하고 빨리 와라'는 식의 사내 지침은 규칙도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어른의 자리에 선 내가, 필요 이상으로 비대화된 예의를 적극적으로 없애는 일에 앞장서야겠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애쓰는 것을 그만두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해 나가고 싶다.

나의 바람이 어떤 형태로든 꼭 실현되길 바란다.

마흔에는 홀가분해지고 싶다

 

24. '죄송합니다'를 '감사합니다'로 바꿨을 뿐인데 188p

일상 대화에서 완전히 존대의 표현을 없애지는 않았지만 닥치는 대로 아무렇게나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존댓말을 최소한으로 사용하기는 내가 중학생 때부터 스스로 정한 나름의 기준이다.

거기에 또 하나, 말투를 의식하며 그만둔 습관이 있다.

바로 '죄송합니다'의 남용이다.

 

애초에 존댓말 사용에 의문을 느끼기 시작한 계기는 '내가 왜 사과해야 해?'라는 분노 때문이었다.

만원 전철 안에서 매일같이 내 교복 치마와 바지 속으로 손을 찔러 넣으려는 치한을 만났다.

그때마다 나는 등 뒤에 있는 샐러리맨을 향해 책가방 너머로 "죄송한데요, 그만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못이 없다.

죄송할 짓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꼼짝하지 못하는 모습을 교묘히 이용해서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고, 성폭력의 현행범으로 체포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행동을 취한 건 어른들이었다.

몇 년이 흐르고 이제는 그 같은 일에 완전히 적응되어서 "그만 만져"라고 소리치며 상대의 손목을 비틀어 올려 버린다.

앞으로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기로 강하게 맹세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보니, 여러모로 그럴 일이 아닌데, 일상에서 자주 '죄송합니다'가 남용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만원 전철에서 내릴 때조차 주위 승객들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하면서 "죄송합니다, 내릴게요"만 외치거나 둘 중 하나다.

 

잘 생각해 보면 전철을 탄 승객이 내리는데 일일이 내릴 때마다 사람들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다.

'내립니다'라고 말하면 자신을 위해 길을 비켜준 사람들에게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비켜주는 쪽도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를 듣는 것보다 '감사합니다'를 듣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극장이나 영화관의 좁은 좌석 사이를 이동하거나 레스토랑의 옆자리와 소지품을 어떻게 둘지 서로 양보할 때도 '실례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도만 주고받으면 충분하다.

요리를 주문할 때 종업원을 불러 세우는 것도 손을 들어서 '부탁합니다' 정도만 말해도 다 알아듣는다.

그런 식으로 '죄송합니다'를 점차 줄여 나갈 수 있다.

 

싫어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거나, 불필요한 겉치레를 걷어치우거나, 일인칭을 '저'에서 '나'로 바꾸는 등 입에서 나오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서 언어를 디자인하는 일은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다.

말을 디자인하는 일은 생각보다 습관화하기 쉽게 전혀 돈이 들지 않으면서 상당히 많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또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오늘 당장 홀가분해지고 싶은 당신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25. 마흔에 할 수 있는 선언 193p

1998년 산 휴대전화는 할부로 구입한 노트북과 함께 대학생인 내가 처음으로 손에 넣은 개인 정보 단말기였다.

흑백 액정의 화면 폭은 단 3행, 그래도 전자 메일의 송수신이 가능한 최신 기종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IT혁명 시절이었다.

나는 이런 작은 기기로 메일까지 주고받을 수 있다니, 생각하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문서를 종이에 인쇄해서 주고받거나, 우표를 붙여 우편함에 넣고 다음 회신을 기다리면서 느긋이 편지를 교환하는 모습이 사라져 간다.

초 단위로 올라가는 비싼 요금을 신경 쓰며 간략하게 국제 전화를 이용하는 모습도 점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나는 손에 쥔 아이폰 X를 때려 부술 뻔했다.

2019년인 현재 일본에서 오는 메일에 '성하지절(한여름을 의미하는 말로 의례적으로 사용되는 계절 인사 문구)에 오카다 님께서 앞으로 더욱 건승하시길 빕니다' 같은 문구가 여전히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절 인사는 요즘 세상에 필요 없죠?"라고 말하면, 아직까지는 전통문화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괘씸한 녀석이라고 비난받는다.

 

일본 사회에서 마흔이 지나면 예의를 표하는 이상으로 주어지는 기회가 많다.

경로 정신에 기초한 윗사람과의 소통은 모르겠지만, 젊은 상대가 나에게 특별한 비용을 쓰려할 때 필요 없다고 거절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일찍이 반신반의로 실천해 온 여러 허례를 적어도 아래 방향으로는 "여기서 끝내죠"라고 말하며 끊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그러니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

 

메일도 전화도 팩스도 세상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개발되었는데, 거기에 구시대의 윤리가 적용하여 일을 번거롭게 진행하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계절 인사는 생략하더라도 '알겠습니다' 같은 단답형의 답은 너무 무례하다거나, 단체 메일은 참조된 복수의 수신인 중에 최연소자가 제일 먼저 답신해야 한다거나, 읽고 씹는 무언의 태도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끊임없이 희한한 매너가 생겨난다.

마치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모습처럼 기울여 찍은 도장 같다.

20년 후에는 지금보다 더 편리한 플랫폼이 생겨날 것이다.

그럼 그때도 새로운 실례가 발견될 것이고, 누군가는 또 쓴소리를 할 것이다.

혹시나 그 주체가 오십 대, 육십 대인 우리가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정말 끔찍하다.

 

나는 실리와 허례를 저울질하다 후자를 선택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인터넷을 접하면서 인생관이 바뀐 최초의 시대다.

우편함에 넣은 감사 편지나 연하장의 수보다 메일 송신 횟수가 훨씬 웃돈다.

디지털 네이티브를 부하로 통솔해야 하는 우리 세대부터는 솔선하여 예의의 이상적인 모습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VR 전도사인 고로맨이 제창하는 '예의 2.0'이라는 말이 있다.

서로의 시간만 빼앗는 '예의 1.0'에 이별을 고하고, 상대의 시간을 빼앗지 말자고 강조하는 사고방식이다.

예의가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정의를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빠른 쪽으로, 간편한 쪽으로, 낭비하지 않는 쪽으로, 부담이 적은 쪽으로,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시간을 최대화하는 쪽으로 말이다.

 

26. 내 인생에서 전화는 빼겠습니다 199p

벌써 몇 년째 명함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빼고 이름, 메일 주소, 웹 사이트 주소만 기입한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이 정도 정보면 충분하다.

얼마 전까지 명함에 주소, 전화번호를 명기하지 않는 프리랜서는 신용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아무에게나 개인정보를 나누어 주고 돌아다니면 위기관리 능력이 떨어져 보여 오히려 상대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제야 그런 시대가 왔다.

생판 남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주면 어쩌자는 말인가?

 

나는 아이폰을 잠시도 내 곁에서 떼놓지 않고 항시 들고 다니지만 전화가 와도 받지 않는다.

연락처에 없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는 대부분 자동 음성 판매 전화 이거나, 잘못 걸려 온 전화 이거나, 잘못 전화한 척 판매를 촉구하는 전화다.

내 전화번호가 악덕 업자에게로 새어 나갔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나는 평소에 업무 상대는 물론이고 친구나 친척과도 잘 통화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 속지 않는다.

극히 드물지만 긴급 연락도 오는데, 대개 문자 메시지가 먼저 온다.

평소에 전자메일, SMS, 그 외의 메신저 등 몇 개의 채널은 바로 훑어보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충분하다.

 

일상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스마트폰이라고는 하나, 여기에 매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화면상에서 '통화' 버튼을 폴더 안으로 깊숙이 잘 보이지 않게 넣어 두었다.

그리고 나의 일상생활에서 그 버튼을 완전히 활용하지 않을뿐더러 터치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전화를 그만두었다.

세계인류로부터 착신을 거부한 셈이다.

 

나에게 이제 전화의 시대는 끝났다.

나는 내 인생에서 전화를 그만두었다.

친구들에게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나중에 만나서 느긋하게 그간의 회포를 풀자고 문자를 보낸다.

전화하지 않는다고 깨져 버릴 우정이라면 애초에 허구에 지나지 않은 거겠지,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면서.

마흔에는 홀가분해지고 샆다

 

27. 서로 상식적이면 참 좋을 텐데 206p

'예의 2.0'을 제창하는 고로맨은 1시간을 소비하는 '예의 1.0'을 파하고 상대의 시간을 최대한 빼앗지 않는 '예의 2.0'으로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례를 들자면 과거에 연락할 때 정중한 수단으로 여겨졌던 전화는 받는 사람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갑자기 걸려온다는 점에서 이미 시대착오적이다.

그는 이제 신속하면서도 낭비가 적은 슬랙(slack)이나 메신저를 이용해 연락을 이행하자고 호소한다.

 

몇 년 전부터 나도 전화하지 않기를 실천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의 주장에 크게 동의한다.

최근에는 각종 채팅이나 메인저조차 왠지 전화처럼 느껴져서 미치겠다.

그룹웨어나 비즈니스 채팅 화면을 열어 두고 근무하는 형태는 여러 개의 전화선을 연결한 채로 계속 통화하며 일하는 형태의 그 모습이 아주 비슷하다.

장점도, 단점도.

 

도구를 새로 맞추기보다 인류를 업데이트시킬 필요가 있다.

하루가 다르게 소통 방식은 새로워지는데, 사람들은  그 이상적인 모델을 과거에서 찾거나 옛날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싶어 한다.

직장에서 분위기를 타지 못하는 무뚝뚝한 부하와 일하기 힘들어하고, 새해 인사 메일이 한 통도 오지 않으면 쓸쓸해하고, 이전과 다르면 '이건 나에게 실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이 같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최신 기종의 스마트폰을 구입하고 최신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도 '예의 2.0'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익숙하고 낡은 예의를 그만두기란 쉽지 않겠지만 저항을 두려워하기보다 감각을 갈고닦으며 계속 도전하고 싶다.

 

28. 스스로가 지킬 수 있는 적당한 선을 찾다 212p

스무 살이 되고 상복이 생겼다.

직접 고른 기억은 없지만 나에게는 내가 입어야 할 상복이 있었다.

아마 엄마가 백화점 할인 기간에 적당히 장만했을 거다.

무릎 아래 기장의 기본 블랙 원피스로 가슴부터 소매까지는 시스루 소재가 사용되었고, 직접 입어 보고 산 게 아니어서 어깨 폭이 조금 크다.

옷장에 걸어 놓았지만 이렇다 할 감상이 솟지 않는 그런 옷이었다.

 

어른의 것으로 생각되기 쉬운 옷은 실은 젊은 청춘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연속된 삶의 방황과 넓은 세상의 한 귀퉁이에 홀로 서서 부족한 경험치와 직감만을 의지해 싸워야 한다.

그들은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큰 바다로 저어 나가는 작은 배 같다.

때문에 갖추어진 제복이나 기성복의 정장은 꽤 도움이 된다.

축이 되는 정답을 알면 방황을 없애 나갈 수 있으니까.

평생에 한두 벌, 그런 옷을 준비해 두면 좋다.

 

상복을 손에 넣는다는 건 젊은이가 죽음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어른이 되는 의식과 같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엄마가 사 준 그 상복은 없다.

삼십 대 중반에 이사하면서 처분해 버렸기 때문이다.

 

복장과 그 같은 사고방식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입을 수 있어도 상복 이외에는 전혀 용도가 없는, 단순한 목적의 드레스를 놓아 버린 건 그 같은 심정에서였다.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한바탕 사내가 술렁거리면 중역들은 캐비닛에서 검은 넥타이를 꺼내 매고 황급히 조문을 가는 광경을 자주 보았다.

대기업의 총무부나 비서실에서 근무하면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1년 내내 새까만 정장을 입는다는 말도 있었지만, 보통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한다.

 

어른이 되면서 누군가의 임종에 급히 달려갈 일이 점점 늘어난다.

얼이 빠진 채 캐주얼한 복장으로, 퇴근해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애도하러 간 적도 있다.

역시나 안 되겠다 싶어 역 앞에서 3,000엔짜리 검의 상의를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하고 겉옷에 걸쳐 입었다.

 

나 역시 매일 죽음과 가까워지다 보니 애도의 뜻을 표현하는 데 있어, 정답을 찾거나 제복에 의지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일상복으로 조문을 가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상복을 내려놓는 이유는 상복 이외에 별다른 용도가 없는 옷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바니스 뉴욕 백화점에서 수수한 검은 옷을 샀다.

7부 소매의 옷깃이 있는 재킷과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원피스를 세트로 구매했다.

장례식, 제사 이외에 내가 보좌하는 행사, 업무 면접, 회식 등 관혼상제 전천후를 대응할 때 손색이 없는 옷이다.

소품도 맞추기 나름이다.

준상복(準喪服)과 약상복(略喪服)의 중간 정도다.

 

'이 겸용 상복으로는 역시 안 되겠다 싶은 사태가 생기면 그때 가서 새로 사자'라는 생각으로 지내 온 지 10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까지 그런 상황은 한 번도 없었다.

 

미국에서 지내다 보니, 친구의 죽음을 직접 애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시간이 흐르고 뒤늦게 묘지를 찾아갔을 때 지금 나의 검은 옷 정도가 딱 좋았다.

 

어른이 될수록 다양한 장례를 경험한다.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하나의 죽음뿐이다.

사실 문상하러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실감하자 어른들이 어린 나처럼 상복에 크게 관여하거나 단속하거나 이를 비난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최근에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제대로 하는 내가 잘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거나, 애쓰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애쓰는 내가 부정당하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정말로 깜짝 놀랐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그동안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제대로 하는 게 편한 사람은 제대로 하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나름대로 하면 된다.

다만 최소한의 매너와 넓은 마음으로 서로를 조금 더 배려할 수 있길 바란다.

 

위의 내용은 유노북스에서 출판한 오카다 이쿠 저자의 마흔에는 홀가분해지고 싶다의 일부입니다.

 

마흔에는 홀가분해지고 싶다 제5장 - 오카다 이쿠

제5장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29. 운전을 그만두고 백배 더 좋아졌다 223P 나는 차가 없다. 묵혀 둔 무사고, 무위반의 운전면허증은 눈부시게 빛나는 골드(유효기간 5년 이상의 우수 면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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