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그만두고 나서 얻은 마흔의 아름다움
9. 내 모습 그대로가 아름답다 83p
나는 여자이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을 하면 여자로 보일까, 저것을 하면 여자로 보이지 않을까'하고 일일이 생각하며 고민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치마를 입는 건 좋아하는 옷을 입은 것이지 누군가에게 여자로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민낯으로 집을 나온 건 오늘 때마침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지 여자로서의 의무에 대한 반골 정신을 발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여자로서 더하기를 그만두니까 초조함에서 오는 의문의 지출이나 한밤중에 불안해서 눈이 띵띵 부울 정도로 우는 헛된 시간들이 줄어들었다.
여자이기를 그만두기로 한 결심은 가성비가 좋은 결과였다.
10. 긴 머리도 좋고, 짧은 머리도 좋다 89p
나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돌발적이며 충동에 쉽게 휩쓸리는 변덕쟁이라, 보수적이라는 표현은 나와 거리가 멀다.
그런 나에게 어릴 때 마음속으로 결심한 이후로 꼼짝 않는, 앞으로도 바꿀 일이 없는, 몇 가지 고정된 스타일이 있다.
옆에서 보기에도 알기 쉬운 예는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다.
내가 짧은 머리를 고집하는 이유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충동적이며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항상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기분 전환을 해 왔다고 말할 수 있고, 어릴 때부터 완곡히 고집해 온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는다'는 결심을 한 번도 싫증 내지 않고 계속 지켜 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실 어린 시절에 머리 모양에 대한 결정권은 나에게 없었다.
대부분 가위를 든 엄마가 욕실에서, 때로는 아빠가 다니는 근처 이발소에서 늘 단발머리로 정리되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함께 등교하는 긴 머리카락을 예쁘게 땋거나 동그랗게 말아 올린 아주 여성스러운 동급생들을 바라보며 무척 부러워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일 편히 지낼 수 있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긴 머리카락이 말끔히 묶여 있지 않아서 불안한 인생보다 흐트러질 때마다 언제든지 손으로 바로 정리할 수 있는 단발머리가 더 좋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이 같은 결론을 내린 게 여덟 살이다.
끈기를 가지고 열심히 어깨에 닿을 때까지 머리카락을 길렀다.
하지만 매일 아침마다 드라이하고, 세팅하고, 목욕한 후에 머리카락을 말리고, 흐트러지면 다시 묶는 일상의 수순만으로도 긴 머리카락의 존재가 힘들어서 바로 항복해 버렸다.
결국 다시 단발머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친척 결혼식 기념사진에서 여덟 살의 나는 어깨까지 기른 머리를 양 갈래로 높이 묶고 한껏 멋을 낸 채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진을 볼 때 "이제 이렇게 긴 머리는 내 평생에 없겠지"하며 한숨을 쉰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큰 가위를 꺼내어 그 한숨과 함께 미련도 잘라 버렸다.
11. 좋은 여자란 누구인가 96p
공공장소에서 화장하는 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찬성인가? 반대인가?
이 같은 질문은 자주논쟁의 소재가 된다.
2016년에 일본의 철도 회사는 전철 내에서 화장하는 모습이 보기 흉하다며 여성에게 매너를 지켜 달라고 충고하는 광고를 게시해 화제가 되었다.
반대로 2017년에 미국의 코스메틱 브랜드는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화장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거리에 거울을 설치하여 여성들을 격려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내 개인적인 의견은 중립이다.
전철 내에서 옆자리 승객에게 강한 냄새를 풍기고 파우더 가루를 사방으로 날리면서까지 요란하게 화장하는 건 민폐다.
그러나 땀을 닦고 번들거리는 기름기를 제거한다거나, 지워진 립스틱을 다시 칠한다거나, 앞머리를 정리하는 수정 정도의 화장은 남 앞에서 해도 문제의 소지가 없다고 본다.
흐릿한 안경알을 닦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몸단장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다름을 모든 여성이 억지로 하나로 맞출 필요는 없다.
처음에 와이어가 들어간 브래지어를 착용할 무렵 나는 브래지어와 팬티는 반드시 위아래를 맞춰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속옷 판매원에게 그렇게 배웠다.
때문에 매장에서 항상 세트로 구입했다.
그 법칙을 상당히 오랫동안 정확히 지켰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꽤 다르다.
사십 대의 나는 매일 브라 톱으로 지내며 브래지어와 팬티도 그 모양과 색상이 항상 다르다.
아주 가끔 회심의 속옷을 찾아 입는데, 몸의 군살을 바로잡아 몸매 보정률을 높인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비일상적인 위엄을 달성한 듯하여 성취감을 느낀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보란 듯이 화장하는 일이나 일부러 뒤죽박죽인 속옷을 입는 일이 어른으로 가는 단계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외모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어떻게든 폼이 날 수 있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내 두 발로 계단을 올라가고자 한다.
어른의 세계는 전국 모의시험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 여성이 좋은 여자상을 갖추기 위해 단 하나의 계단을 오를 필요는 없다.
좋은 여자상이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12. 전문가에게 맡기고 홀가분해졌다 101p
화장은 사회적 갑옷이다.
나에게는 갑옷 이상의 의미가 없다.
앞으로도 길게 이어질 인생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압도적인 미와 자신감으로 무장되기 위해 중후하고 멋진 갑옷이 필요한 상황이 많을 거다.
그래도 갑옷은 갑옷에 지나지 않는다.
가능한 한 가벼운 게 좋고, 언제든지 벗을 수 있어야 한다.
피곤할 때, 바쁠 때, 내키지 않을 때 언제나 편하게 벗을 수 있어야 한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네일은 가장 얇고, 가장 작고, 가장 가볍지만 상당히 방어력이 높은 일점 호화 소비인 동시에 슈퍼미니멀한 갑옷이다.
스무 살까지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있어도 남자로 오해받던 내가, 손톱에 매니큐어만 발랐을 뿐인데 캐주얼한 옷을 입어도 이제는 여성스러워 보인다.
직업상 손톱에 화려한 디자인을 그릴 수 없는 사람은 손과 손톱만이라도 관리를 받으면 손의 인상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네일숍을 다니면서 화장이 점점 옅어지더니 이윽고 맨얼굴로 나가는 빈도도 높아졌다.
'손에 이만큼 신경 쓰니까 얼굴은 조금 덜 신경 써도 되겠지'라는 마음이다.
매일 빈틈없이 화장할 여유는 없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잦은 빈도로 미인의 기분을 맛보고 싶다.
나처럼 생각하는 여성에게 네일 아트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13.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취향'이라는 보통 명사 107p
지금까지 미용은 전문가에게 맡기자고 계속 이야기해 왔다.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경우에는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돈을 지불해서라도 이것저것 맡겨 보자는 사고방식이다.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사치를 좋아하는 여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고급 스킨케어 화장품에서 메이크업 도구까지 세트로 구비해 놓고 좋아하는 브랜드의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사 모으는 여성들보다 미용 면에서 매월 돈을 덜 쓸 자신이 있다.
그런 나도 사치를 부리는 미용이 딱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샴푸다.
슈퍼나 드러그스토어의 선반에 죽 나열된 다양한 샴푸를 둘러보면서 내가 이것들을 살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다.
신기했다.
예전에 나는 샴푸가 떨어질 때마다 매번 다른 종류의 샴푸를 사곤 했다.
샴푸는 화장품과 달리 그 자리에서 테스트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상품 설명만 보고 어림짐작해서 샀다.
사용감이 조금 부족하면 다 쓰기 전에 새로운 샴푸를 다시 사기도 했다.
반대로 괜찮은 샴푸를 발견하면 같은 제품으로 향만 바꿔서 사용했다.
여러 샴푸를 쓰던 시절이 나름대로 즐거웠던 터라 깨닫지 못했는데, 이전의 나는 '이거다' 싶은 제품을 만나지 못해 계속 정처 없이 이곳저곳 떠돌던 샴푸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나름 즐거웠어도 그때 즐거웠던 만큼 귀중한 시간을 꽤 낭비해 버려서 후회가 되는 것이다.
내 경우에 그 궁극은 '연애'다.
현재의 남편과 교제 기간 없이 결혼한 뒤에 더 그렇게 느낀다.
과거의 실패를 떠올리면서 그 사람과 만나지 않았으면 더할 나위 없지 않았을까, 절실히 느낀다.
마음대로 골라잡은 샴푸가 진열된 선반을 보고 조금 피곤한 듯 지겨운 기분이 드는 이유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의 반은 이성이라고 큰소리치며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연애에 너무 일희일비하던 시절이 떠올라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만 사용해!"라고 주장하는 할머니의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는 부분이 가끔 성가실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치에 맞고 집념이 느껴져서 멋있기도 했다.
이것저것 헤매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부디 즐거움을, 조심하기 바란다.
분명 좋아했는데 멈추어 보니 전혀 좋아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인생에는 그런 일이 의외로 많다.
14. 하마터면 계속 화장할 뻔했다 112p
나는 화장이 서툴다.
처음 산 메이크업 아이템은 아마도 아이브로펜슬, 25년 이상 씨름해 왔지만 좌우 대칭으로 그린 전례가 없다.
향상심이 없으니 발전이 없는 건지, 귀찮아서 하는 변명을 뿐인지 칠하면 칠할수록 허점이 드러나는 기분이 든다.
결점을 커버하기는커녕 짙은 화장을 할수록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만 늘어나서 우울하다.
이 상태로 화장을 계속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친구들과 놀러 가서 며칠 묶는 동안 여자 숙소의 기상 시간이 남자 숙소보다 2시간 빨랐다는 것.
아침 일찍 일어난 여자들은 즐겁게 몸단장을 했으나, 그 무리에 끼지 못한 채 나는 이 모습이 어쩐지 불평등하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배우지만 그 주변에서 여자들은 매일 아침 2시간씩 핸디캡을 짊어지는 것 같았다.
나머지 하나는 화장품 회사에서 모델 체험을 했을 때의 일이다.
일반인 얼굴에 두 종류의 화장을 해 주고 어떻게 인상이 극적으로 바뀌는지 비교해서 보여 주는 이벤트였다.
음영을 넣어 콧대를 높이고 작은 얼굴이 되는 데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이섀도는 일곱 가지 가까이 되는 색상을 조합해서 사용했다.
아무거나 대충 사서 어림짐작으로 적당히 화장해 왔는데 그동안 내가 엄청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기술력에 차이가 있으면 전문가에게 직접 맡기는 게 제일 낫겠다고 판단했다.
뉴욕에서 생활하다 보니 선크림과 립밤만 바르고, 눈썹도 그리지 않은 맨얼굴로 나갈 때가 많아졌다.
거리를 걷는 여성들은 피부색부터 제각기 개성이 넘치고 화장을 하든 안 하든 주변의 시선에 크게 흔들리는 일이 없다.
큼지막하고 화려한 선글라스를 써도, 얼굴이 수수해도 왠지 모르게 여유롭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 날에는 얼굴 전체에 가볍게 파우더를 두드리고 눈썹을 덧 그리고 필요하면 립스틱 정도만 바른다.
도쿄에 있을 때 업무상 남 앞에 서는 날과 오래 남을 사진을 찍는 날에는 상점가 미용실을 예약해 전문가에게 메이크업을 받았다.
내 피부에 어울리는 색과 최신 유행하는 눈썹 모양 등을 배우면서 메이크업을 받아도 3,000엔 정도다.
매일은 아니어도 기나긴 인생 중에 아주 잠깐, 가끔 그런 기분을 맛볼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대만족이다.
그렇다고 내가 화장을 그만둔 게 스스로를 미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다.
여자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미인이고 싶다'는 마음이 나에게 항상 내재된 욕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흔을 앞두고 확실히 깨달았다.
그로 인해 나는 화장을 그만둘 수 있었다.
나는 일류 전문가에게 종종 화장을 받으며 화장을 그만둔 인간이 되어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상태의 흐릿한 일상을 더 많이 살고 있다,
가끔 유리창에 비치는 내 생얼에 흠칫 놀랄 때도 있지만 '그래, 오늘은 이런 날이야. 하지만 플러스알파의 미인이 되고 싶은 날에는 빈틈없이 대변신을 할 거야'라고 다짐한다.
그렇게 평소에 화장하지 않는 자유를 마음껏 구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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